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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 인물기행/제갈공명11

차이나리 2018. 4. 3. 20:06

세 번의 북정 실패

 

삼국지 인물기행/제갈공명11 회가 시작됩니다

 

관중이 오나라와의 싸움으로 허술해졌다고 판단한 제갈공명은 또다시 북정을 결의했다.

"선제께서는 위나라와 양립할 수 없을 뿐 아니라 한나라가 성도와 같은 오지에 도읍을 두고 있음을 심히 걱정하셨나이다. 그러기에 신으로 하여금 적을 치도록 부탁하셨던 것이지요. 하오나 선제께서는 신의 역량이 위나라에 미치지 못하는 것도 잘 알고 계셨습니다. 적은 아주 강하나이다. 그렇다고 해서 적과 싸우지 않고 가만히 있는다면 왕업은 무너지고 말 것이옵니다."

 

제갈공명은 이렇게 시작되는 후출사표를 바쳤다. 12월 제갈공명의 군사는 산관을 넘어 진창을 포위했다. 위나라 수비병은 1천여 명이었고 그 장수는 학소였다. 수비는 매우 견고했다. 학소가 진창성을 굳세게 지키고 있자, 근상이란 자가 성 밖에서 학소를 불렀다.

 

"성 중의 학소에게 말하겠소. 지금 제갈공명 장군은 수만 명의 군사를 이끌고 와서 진창성을 포위하고 있소이다. 즉시 성문을 열고 항복하는 것이 좋을 것이오."

 

학소는 성벽위에서 대답했다.

"지금 그대는 나에게 무슨 말을 하는 거요. 나에게는 죽음이 있을 뿐이오. 돌아가거든 제갈공명에게 말해 주오. 외의만은 감사하다고... 그러니 공격을 하려면 해 보라고 이르시오."

 

제갈공명은 다시 한번 교섭사절을 보냈다.
"병력으로 볼 때 촉한의 군사는 수만명이고 귀측은 불과 1천여 명이니 어릭석은 짓은 하지 마오. 항복하는 것이 좋을 것이오."

 

결국 교섭을 이루어지지 않았다. 제갈공명은 단숨에 성을 공격했다. 격렬한 공방전이 벌어졌다. 제갈공명은 기병부대를 내어 운제, 중차를 사용하여 성을 부수려고 하였다. 그러자 학소는 화전을 쏘아서 운제를 불태우고 돌절구로 충차를 파괴했다. 제갈공명은 백척의 정란을 만들어서 성 안으로 화살을 쏘아대고, 돌과 기와를 던져서 호를 메워 성을 공격하려고 했다. 학소는 중교를 구축하여 이를 막았다.

 

공방전은 20일 남짓 계속되었지만 결국 제갈공명은 진창성의 포위를 풀고 말았다. 위나라에서는 비요를 파견했다. 그리고  오나라와 전투 중인 장합에게 진창을 구원하라고 명령했다. 위나라 명제가 장합에게 물었다.

"그대가 도착하기까지 제갈공명이 진창성을 함락시키지 못할 것 같소이까"


예 그러하옵니다. 제갈공명은 지금 위나라 깊숙히 들어와 있는 까닭에 보급로가 충분치 못합니다. 신이 진창에 도착할 때쯤이면 제갈공명은 퇴각하고 있을 것입니다. 식량은 앞으로 열흘을 지탱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

장합이 남정에 도착하자 진창의 포위는 풀려 있었다. 학소는 큰 공을 세웠지만 얼마 안 되어 병사했다.

조진의 침입

서기 229년 봄, 제갈공명은 또다시 감숙지방에 손을 뻗치려 했다. 이 지방에는 티벳계인 강족들이 살고 있었다. 이들을 아군으로 편입시키고자 했던 것이다. 농우가 제갈공명 지배하에 들어왔다. 공명은 승상으로 다시 복직되었다. 이때 노장 조운이 죽었다.

 

손권이 황제의 자리에 올랐고 황룡이라 개원했으며 건업으로 천도했다. 마침내 천하는 삼분되었다. 촉한에서는 오나라가 불손하다는 의견이 나왔다. 그러나 제갈공명은 설득했다.

"위나라를 쓰러뜨리기 위해서는 오나라와 동맹할 필요가 있은 즉 경솔히 다룰 문제가 아니오.

제갈공명은 자기 형인 제갈근에게 편지를 써 보냈다.

"효기가 순수하고 충의로운 성격임을 해가 갈수록 느낍니다. 동서를 화합시키는 데는 다시 없는 인물입니다."


서기 230년, 제갈공명은 50세가 되었다. 그 무렵 그가 고민했던 일은 이엄에 대한 처치였다. 이엄은 재능은 뛰어났으나 불평불만이 많았다.  이엄의 입장에서 보면 대우에서 차이가 너무 많은 것이다. 제갈공명은 그해에 이엄을 표기장군 삼아서 물자 보급을 맡겼다. 이엄에게 있어서는 자신의 힘이 과소평가당하는 것 같아 불만이었다.

 

위나라에서는 조진이 촉한 공격을 계획했다. 그는 조조의 먼 친척이자 문제의 친구였다. 젊었을 때 호랑이에 쫒기자 화살 한 대로 쓰러뜨린 명궁이었다. 그리하여 문제로 부터 사마중달과 함께 후사를 부탁받은 일이 있었다.

마침내 조진은 야곡도로, 장합은 자오곡으로, 사마중달은 서역으로 돌아 각각 한중에 공격을 가하게 되었다.

 

제갈공명이 이 보고를 받자 낙성, 적판에서 위군을 기다렸다가 치기로 했다. 이엄에게 군사 2만을 이끌고 한중을 구원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제갈공명은 이때 이엄이 강주 더나기를 싫어한다는 것을 알고 그 아들인 이풍을 강주도족으로 임명했다. 그러나 이엄은 제갈공명의 명령에 따르지 앟았다.

사마중달과의 대전

제갈공명은 서기 230년부터 준비를 하여 이듬해 2월 기산을 공격했다. 이엄에게 한중 땅을 맡기고 제갈공명은 출진했다. 이때 공명은 물자 운반구인 목우, 유마 등을 발명했다고 한다. 사마중달은 비요, 대능 두 장수에게 상규를 지키게 하는 한편, 장합, 곽회 등을 이끌고 전군을 몰아 기산을 구원하러 나섰다. 공명은 왕평에게 명하여 장합을 상대하게 하고 자기는 곽회의 군단을 공격했다.

 

사마중달은 후퇴했으며 공명을 이를 추격했고 비요에게도 승리했다. 사마중달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제갈공명은 일부러 군사를 물리어 적을 유인해 내려고 했다. 그러자 사마중달은 이들을 추격하는 듯 하다가 노성에서 진군을 멈추었다. 장합은 그것이 못마땅했다.

 

"공은 촉한을 마치 호랑이처럼 두려워하십니다. 그래서야 어찌 전쟁을 할 수 있겠습니까, 천하의 웃음거리가 되고 말겠습니다."

 

사마중달은 하는 수 없이 장합에게 촉한군의 일대를 추격토록 시키고, 자신은 중앙에서 제갈공명의 군단을 추격했다. 제갈공명은 자기가 바라던 대로 되자 적의 전리품을 획득했다. 그러나 장마철이 되어 식량보급이 안되자 퇴각하고 말았다. 사마중달은 장합에게 추격명령을 내렸다. 장합은 간청했다.

 

"지금 제갈공명을 추격하는 것은 병법에 맞지 않습니다."

사마중달은 듣지 않았다. 장합은 군사를 이끌고 추격하다가 목문에서 복병을 만나 다리에 화살을 맞고 말았다. 결국 장합은 전사했다. 한중으로 돌아온 제갈공명은 보급이 끊어진 원인이 이평의 간계에 의해서임을 알고 분개햇다.

제갈공명은 후주에게 곧 상주를 올렸다.

 

"이평은 언제나 자신만의이익을 꾀하고 자신을 위한 행동만을 했으며 나라를 걱정하는 일이 없었나이다. 신이 북정을 위해 출발할 때 신은 그에게 한중을 지키도록 부탁했건만 그는 핑게를 대어 응해주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은 신이 왜 이처럼 이평을 후대하는지 의심했던 듯하나이다. 하오나 신은 대사를 이룰 때까지는 어떻게든 그의 단점을 감추어 주려는 생각이었습니다. 하온데도 이평은 오르지 이익에만 눈이 어두운 자였나이다. 신의 불명함을 용서하소서."

 

이평은 비록 귀양을 갔지만 제갈공명이 자기 생명을 구해준 것으로 믿었다. 제갈공명이 죽자 한탄했다고 한다.

이렇게 해서 북정은 세 차례나 실패했다. 이때 위연과 유염의 불화가 심각했다. 이것이 촉한의 한 가지 결합이었다. 공명은 촉한에 인재가 없음을 탄식했다.

 

삼국지 인물기행/제갈공명11 회를 마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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