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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록제갈공명 (12)
역사 풍경 기행
제갈공명 처세술 명언 은 대부분 명나라 청나라 때 간행된 각종 문집에 포함되어 있다. 공명심서의 전신이라 할 수 있는 '제갈공명집'에 수록되어 있는 '장원'은 제갈공명의 글로 인정되는 것이 많다. 장원 전 50편 중에서 반 가량은 장수론이고 나머지 반은 병법론이다. 이중 장수론은 오늘날에 비추어보면 정치인이나 공직자의 직업윤리와 직결되는 것이 많다. 말하자면 지도자의 리더십을 다루고 있다. 이 주제에 맞는 내용을 발췌해서 소개한다. 내부 분쟁자 군이나 나라를 내부붕괴로 몰고 가는 무리는 다음과 같은 부류의 사람들이다. 1. 동료를 중상하고 도당을 만들며 능력이 있는 자를 비방한다. 2. 특별히 남의 눈에 띄도록 화려한 옷을 입는다. 3. 할 수도 없는 요술을 자랑삼으며, 이상한 말로 우롱한다. 4. 공적..
오장원의 쓸쓸한 가을 삼국지 인물기행/제갈공명12 회가 이어집니다 2년간의 북정 준비기간을 거쳐 서기 234년 2월, 제갈공명은 네번째 북정에 올랐다. 병력은 10만 명.야곡을 지나 유마로 식량을 운반하면서 위수 남안 무공으로 나아갓다. 위나라에서는 사마중달이 총대장에 임명되었다. 제장들은 위수에 진을 치고, 제갈공명의 군단을 기다리자고 했으나 사마중달은 그 계획에 찬성하지 않고 강을 건너 남쪽에 진을 쳤다. 병법에서 말하는 배수진이다. 사마중달이 장수들에게 말했다. "제갈공명이 용감한 자라면 무공에서 나와 산을 따라서 동쪽으로 향할 것이오. 만약 그가 서쪽으로 나와서 오장원으로 올라간다면 우리 군단은 안전할 것이오. 동쪽으로 가면 급전이요, 서쪽으로 가면 지구전을 벌이자는 것이다." 제갈공명의 군단은 ..
세 번의 북정 실패 삼국지 인물기행/제갈공명11 회가 시작됩니다 관중이 오나라와의 싸움으로 허술해졌다고 판단한 제갈공명은 또다시 북정을 결의했다. "선제께서는 위나라와 양립할 수 없을 뿐 아니라 한나라가 성도와 같은 오지에 도읍을 두고 있음을 심히 걱정하셨나이다. 그러기에 신으로 하여금 적을 치도록 부탁하셨던 것이지요. 하오나 선제께서는 신의 역량이 위나라에 미치지 못하는 것도 잘 알고 계셨습니다. 적은 아주 강하나이다. 그렇다고 해서 적과 싸우지 않고 가만히 있는다면 왕업은 무너지고 말 것이옵니다." 제갈공명은 이렇게 시작되는 후출사표를 바쳤다. 12월 제갈공명의 군사는 산관을 넘어 진창을 포위했다. 위나라 수비병은 1천여 명이었고 그 장수는 학소였다. 수비는 매우 견고했다. 학소가 진창성을 굳세게 지..
오늘은 삼국지 인물기행/제갈공명10 회가 이어집니다. 기산을 향해 출격 촉한군은 제갈공명을 총대장으로 하고 성도를 출발했다. 성도에 있으면서 임무를 맡은 사람은 장완, 장예 등이다. 제갈공명은 성도를 떠나자 향로를 한중으로 잡았다. 한중에서 위나라 영토인 관중까지는 촉잔의 험로를 넘어 눈앞의 거리였다. 한중 땅에 들어가자 공명은 면수 북쪽인 양평관의 백마산에 본진을 쳤다. 한수의 흐름을 타고 내려가면 제갈공명이 젊었을 때 살다가 유비의 방문을 받았던 용중이 나온다. 공명을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모른다. 위나라에서 상용의 신성에 파견된 장수는 맹달이었다. 그는 촉한을 섬기다가 관우의 구원을 거부하고 위나라에 항복했었다. 그는 조비가 죽자 촉에 다시 돌아갈까 하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공명은 이 신뢰없..
삼국지 인물기행/제갈공명9 편이 이어집니다 제갈공명 출사표 "그대의 말이 옳소" 드디어 오나라와 촉한의 화친이 성립되었다. 서기 224년, 손권은 장온을 촉한으로 파견하여 국서를 봉정했다. 공식적인 축하연 자리에서 제갈공명은 진복을 장온에게 소개했다. 장온의 내방에 대하여 공명은 답례사절로 등지를 파견했다. 손권과 등지에게 먼저 말을 건넸다. "만약 천하가 태평해지고 오촉의 두 주인이 정치를 한다고 하면 그 얼마나 즐거운 일이겠소" 등지가 대답했다. "하늘에는 두 개의 해가 없다고 하나이다. 위나라를 통합한 다음의 일은, 아뢰옵기 황송하오나 대왕이라고 해서 천명을 받으신 분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사옵니다. 주군들께서 각기 그 덕을 쌓으시고 저희 신하들은 각기 충성을 한 다음, 무기를 들고 전쟁을 시작할 뿐..
유탁을 받은 제갈공명 후주 유선은 아버지인 유비가 걱정했던 것처럼 범용한 인물이었다. 그런 천자를 세우고 위나라, 오나라와 대항해 나간다는 것은 제갈공명에게 있어 곤란하고 고민스러운 일이었다. 그러나 공명은 이 일에 감연히 맞섰다. 공명의 가장 큰 목표는 위나라를 무찌르고 유씨 천하를 부흥시키는 일이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국내에서 인재를 발굴하고 기구를 정비할 필요가 있었다. 현재의 운남지방, 즉 당시의 익주군에 살고 있는 이민족을 평정해야 했다. 외교면에서는 오나라와 교섭할 필요가 있었다. 선제 유비는 관우의 원수를 갚겠다면 오나라와 싸웠으나 위나라를 무찌르기 위해서는 오나라와 동맹하지 않으면 안된다. 제갈공명은 이런 여러 가지 문제들을 어떻게 처리해 나갈 것인다. 그때 그는 승상, 군사중랑장, 녹상서..
관우에 이어 장비를 잃은 유비의 운명 삼국지 인물기행/제갈공명8 서기 216년 조조는 위왕이 되었다. 후계자를 조비로 정했다. 이듬해 조비, 조식 형제가 태자의 자리를 놓고 다투다가 암투를 벌였다. 조식이 실각했다. 이 분위기를 틈타 유비가 출병을 준비했다. 법정이 건의를 했다. "조조는 군사를 일으켜 장노를 항복시켰고 한중 땅을 평정했습니다. 그 승세를 타고 파촉을 취하지 않고 업 땅으로 돌아갔습니다. 내부에 심상치 않은 정세가 있을 것입니다. 백성을 모아서 하후연, 장합 등을 치면 승리를 거둘 수 있을 것입니다." 유비는 법정의 의견을 받아들여 한중 땅으로 출병할 것을 명햇다. 자신도 양평관으로 출진했다. 그는 성도를 지키고 있던 제갈공명에게 군사 지원을 요청했다. 공명은 즉시 증원부대를 파견했고, ..
삼국지 인물기행/제갈공명6 형주에 남아 있던 제갈공명은 유비가 진로를 서쪽으로 잡아 면죽을 거쳐 낙성으로 향했다는 소식을 듣자, 이 기회를 놓쳐서는 안되겠다며 관우만을 형주에 남겨둔 채 출발했다. 공명은 손권, 조운 등가 양자강을 거슬러 올라가 파촉으로 향했는데, 도중에 파동, 강주 등지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파군을 평정한 유비는 군단을 두로 나누었다. 일대는 장비가 장수가 되어 이끌며 파서에서 덕양으로, 다른 일대는 조운을 장수로 하여 강양에서 건위로 나와 각각 성도를 향해 진격해갔다. 낙성을 공격 중이던 유비는 그곳에서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었다. 낙성의 수비대장인 유순은 유장의 아들인에 성을 굳게 지키며 유비의 공격을 1년 동안이나 막아냈다. 이 때 방통이 전사했다. 낙성을 함락시킨 유비는 오랫만에..
삼국지 인물기행/제갈공명5 유언이 188년 익주목에 임명되어 사실상의 독립정권을 수립했을 때, 힘이 되어 주었던 사람은 토착 호족이었다. 유언은 치소를 면죽에 정했다. 그의 집에 나이 지긋한 미인이 무상 출입했는데 그 미인이 바로 오두미도 창시자인 장노의 어머니였다. 유언은 '익주에 천자가 있다'는 말을 듣고 익주로 갈 것을 결심했고 파촉에 도착하자마자 곧 천자 행세를 했다. 그는 파촉의 호족인 왕함, 이권 등 10여 명을 죽여 자신의 위세를 과시했다. 이것은 유언에게 있어 불리한 요인이 되었다. 당시 정세로 볼 때, 그 지방에서 자신의 세력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우선 토착 호족의 지지가 없어서는 안 되었기 때문이다. 임기와 가룡이 유언에게 반기를 들었다. 유언이 승리를 거두어 주목의 지위를 차지했다. 그..
적벽대전 삼국지 인물기행/제갈공명4 "좋소" 이제 제갈공명은 유비의 휘하에 들어왔다. 관우와 장비가 은근히 시기를 했다. 그들은 유비와 결의형제 한 사이로 견마의 수고를 아끼지 않을 결심이었다. 죽을 때까지 함께 하자고 맹세한 사이가 아닌가. 유비는 제갈공명만 총애하는 것 같아 두 사람은 분개했다. 유비는 관우, 장비 두 사람을 불러 놓고 타일렀다. "나와 공명의 관계는 마치 물과 물고기의 관계나 마찬가지요. 이 점을 이해하고 불평을 하지 말아주오" 서기 208년에 적벽대전이 일어났다. 조조의 남진은 실패로 끝나고 제갈공명의 천하삼분지계가 제일보를 내딛게 되었다. 유표에게는 두 아들이 있었다. 유표는 자기 후계자로서 후처인 채씨 부인이 낳은 차남 유종을 꼽고 있었다. 장남인 유기는 제갈공명에게 상담을 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