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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산 기념관 재대로 보는 법

차이나리 2018. 2. 25. 20:00

부산 용두산 공원 아래 위치한 백산 안희제 기념관은 백산 안희제(1885~1943) 선생의 항일독립운동을 기념하기 위하여 설립한 것이다. 백산은 기념관이 서 있는 이곳에 백산상회를 설립 운영하며 독립운동 자금을 마련했다. 상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출발한 1919년에는 백산무역주식회사로 확장하여 임시정부와 국내 독립운동의 거점으로 활용했다.

 

임시정부의 성립은 우익전선과 좌익전선, 무장투쟁 노선과 외교노선, 그리고 여러 갈래의 운동노선이 합작하여 총지휘부로서 자리했음을 의미한다. 동시에 임시정부는 최초로 민주주의 방식의 공화주의를 채택한 공식 망명정부가 되었다.

 

임시정부 청사는 상해 프랑스 조계지에 위치한 3층 건물이었다. 미주에서 안창호, 박용만, 노백린 등이 상해로 와서 합류했고 국내 인사들도 속속 몰려들었다. 북경과 만주 등지의 동포도 상해로 거주지를 옮겼다. 1920년 한 해 동안 2천여 명의 조선인이 몰려들었다.

 

이들은 역이나 부두에서 하루살이 노동이나 장사를 하며 힘겹게 살았다. 전차 차장이나 점원 노릇을 하기도 하고 번역 또는 교사로 생활을 꾸려나가는 지식인도 있었다. 중국인들은 남루한 조선사람을 얕잡아 보아 '꺼우리 팡스' 또는 망국노라 불렀다.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국내의 재산을 처분하거나 친지의 지원을 받아 돈을 숨겨 상해로 오기도 했다. 또 인구세와 독립공채를 통해 독립자금을 모집한다는 말을 듣고는 적극 나섰다. 하와이를 비롯하여 연해주, 용정 등지에 사는 동포들도 모은 돈을 보냈다. 열악한 조건에서 일하는 멕시코의 에니깽들도 한 푼 두 푼 성금을 모아 상해로 보냈다.

 

독립공채는 조국이 독립한 뒤에 갚는다는 조건으로 정부에 돈을 빌려주는 형식이지만, 되돌려 받을 생각으로 내는 사람은 없었다.

 

국내의 지주와  자산가 중에는 공채를 사서 벽장 속에 깊이 감추어 두는 사람이 많았다. 새벽에 권총을 들고 들이닥쳐 군자금을 내라고 요구하는 비밀요원에게 증거물로 독립공채를 내밀기도 했다. 애국금이나 인구세를 내면 대개 영수증을 발급해 주었다.

 

신한민보에 의하면 1919년 미주의 대한인국민회에서 모금한 돈의 내역을 보면 안창호가 상해로 온뒤 1만 달러를 송금했고, 김규식에게 4천 달러를 송금했다. 총액은 2만 달러 정도였다. 대한인국민회는 공식적으로 3만 6천 달러를 보냈다. 미주에서는 대한인국민회 지부별로 모금을 하여 해마다 결산을 했다. 하와이 노동자들은 월 20센트씩 꼬박꼬박 냈다.

 

초기의 임시정부는 독립에 대한 열망에 힘입어 풍부한 자금을 확보해 의욕적으로 사업을 벌였으나 2년이 못 되어 내분을 겪기 시작했다. 임시정부에 이질적  이념집단이 참여하고 각기 다른 투쟁노선을 지난 인사들이 결합하면서 각자 패권을 잡으로 하거나 심지어 예전의 양반과 상놈, 서인과 남인이 대립해 갈등을 빚은 데 직접적인 원인이 있었다.

 

임시정부는 외교론을 편 이승만 계열, 개량주의 노선을 견지한 안창호 계열, 무장투쟁노선을 내세원 이동휘 계열 등 세 계열이 주도했다. 안창호와 이승만은 미주에서 민족운동을 하면서 갈등을 빚었다. 안창호는 합리적이고 타협적으로 일을 추진했으나 이승만은 자기 신념과 확신에 차서 상대방에게 자기 주장을 강하게 밀어붙였다.

백산 안희제 선생의 애국심

초기부터 문창범, 박용만 등 무장투쟁론자들은 임시정부에 대한 참여를 거부하고 외곽에서 활동했으나 이동휘만은 국무총리직을 맡았다. 박용만과 이승만은 서울의 감옥동지였으나 하와이에서 함께 독립운동을 하면서 노선이 다르고 성격이 달라 한자리에 앉아서도 말을 붙이지 않을 정도로 사이가 나빴다.

 

이승만의 독단이 계속되자 비난여론이 거세게 일어났다. 파리 강화회의 미주대표로 선정된 뒤 미국에서 여권을 내주지 않자 그는 조선을 국제연맹에서 위임하여 통치해 달라는 청원서를 냈다. 또 일본은 영국의 식민지처럼 조선에 자치를 허락해야 한다는 주장을 폈다.

 

이 때문에 미주동포들은 이승만을 일제와 야합한 제 2의 이완용이라 거세게 비난했다. 이승만은 1920년 12월 상해에 나타나 대통령으로서 업무를 시작했으나 무어 하나 속시원하게 풀지 못했다. 신채호는 이승만이 하는 일에 사사건건 들고 나서 격렬한 반대론자로 떠올랐다.

 

이승만의 권위주의적이로 자기중심적인 리더십으로 복잡하게 얽힌 내분을 수습할 수 없었다. 이승만은 마침내 불만을 품고 상해에 온 지 6개월만에 하와이로 돌아갔다. 한편 이회영, 신채호, 신숙, 김창숙 등은 이승만과 임시정부의 온건외교론을 반대하여 북경으로 가버렸다.

 

분쟁의 첫 신호는 1921년 봄 북경에서 터졌다. 북경에 있던 신채호, 김창숙 등은 반대세력을 규합하여 임시정부의 업무를 자신들에게 모두 넘겨달라고 요구했다. 이 회의에서 하와이 대표로 참석한 권성근이 최초로 이승만이 국제연맹에 위임통치안을 요청한 사실을 폭로했다.

 

대표들은 경악을 금치 못하고 즉각 이승만과 임시정부에 대한 불신임안을 결의했다. 이에 호응하여 만주지역의 여준, 김동삼 등과 상해의 안창호, 여운형 등이 국민대표회의 소집을 요구했다.

 

한편 임시정부 국무총리 대리를 맡은 신규식을 비롯한 이시영, 조완구 등은 이승만과 임시정부를 옹호하고 나섰다.

1921년 5월 상해 북경 천진 남경 하와이 대표가 참석한 가운데 국민대표주비회가 열렸다. 이승만은 분기기 치솟아 미국으로 홀연히 가버렸다.

 

임시정부의 외교노력이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하자 무장투쟁 노선의 필요성이 대두됐다. 당시 무장투쟁 단체로는 서로군정서, 북간도에 자리잡은 북로군정서가 있었다. 북로군정서는 청산리 전투에서 큰 전과를 올렸다.

 

임시정부는 가시적 성과를 거둔 것으로 독립신문을 발행했다. 임시정부의 기관지로 일주일에 2~3회, 타블로이드 판으로 4면을 발행했다. 창간 당시 사장 겸 주필을 이광수, 편집국장을 주요한이 맡았고 자금 5천원을 댄 이영렬이 영업국장 일을 보았다.

 

1921년 이광수가 귀국한 뒤에는 박은식이 주필, 차이석이 편집국장을 맡았다. 논설과 기사는 독립정신을 고취시키는 격렬한 분위기를 띄었고 논객으로 이광수, 박은식을 비롯한 열혈청년들이 활동했다. 박은식의 '한국독립운동사'도 발간했다.

신문은 원칙적으로 판매를 위주로 하고 광고료까지 받았다. 보급망으로 연길과 호놀룰루 등에 각국 분전소 36개소를 두어 보급했다. 특히 비밀연락원들이 만주 안동의 이륭양행과 부산의 백산상회를 통해 국내에 신문을 보급했다.

독립신문은 임시정부의 존재와 활동을 알리는 데 크게 기여했다.

 

백산은 일제의 침략이라는 민족적 위기 상황에서 민족교육, 기업육성, 항일언론 등 다방면에 걸쳐 국권 회복을 위해 국내 외에서 활동한 민족독립 운동가였다. 백산상회가 상해 임시정부에 독립자금을 보내는 것을 눈치챈 일본경찰의 수사로 발각되자, 백산 선생은 1933년 만주로 건너가 발해농장을 세워 중국인 에게 착취당하던 조선인들의 자립을 도왔다.

백산상회는 부산의 독립운동 거점

만주에 많은 땅을 매입해 경상도 농민들에게 땅을 나눠주고 농지를 개간했다. 2세 교육을 위해 보통학교를 세워 교육사업에도 열정을 보였다. 발해농장에 대종교 본거지가 들어오자 일본은 종교인들을 억압했다. 백산 선생은 당시 신병치료를 위해 고향인 경남 의령에 있다가 만주에서 급파된 형사들에게 체포되어 다시 만주를 끌려갔다. 경찰서에서 모진 고문을 받다가 1943년 8월 3일 순직했다.

 

백산 안희제 선생은 백범(白凡) 김구 선생, 백야(白冶) 김좌진 장군과 함께 '삼백(三白)'으로 불릴 정도로 한국의 독립운동사에 족적이 큰 인물이다.

 

백산은 1885년 경남 의령에서 태어나 서울로 유학을 떠나 보성전문학교(현 고려대 전신) 경제과에 들아갔다가 1910년 양정의숙에서 학교를 마쳤다. 서울에서 5년 동안 공부를 하면서 계몽주의에 눈을 뜨고 영남 친구들과 함께

교남교육회를 결성했다. 지방 순회강연을 다니면서 학교 설립운동을 벌였다.

 

의령에 의신학교와 창남학교를 세우고 부산에서는 구명학교를 세웠다. 백산은 구명학교에서 교장으로 재직하면서 비밀결사단체인 대동청년단을 결성한다. 1914년에 부산 동광동에 백산상회를 설립해 독립운동가들의 아지트를 만들었다. 1920년대에는 동아일보 창립 발기인으로 부산지국장을 맡기도 했고 중외일보 사장으로 일제에 언론투쟁을 벌이기도 했다.

 

관련 정보

의령 문화관광  http://tour.uiryeong.go.kr

문화재청  http://www.cha.g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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