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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풍경 기행
부산 광복기념관 본문
부산 지역의 항일 운동사
부산 광복기념관 은 1876년 부산항이 개항한 이후 조국이 광복될 때까지 일본의 침략상과 그에 항거한 부산지역의 항일 독립 투쟁의 역사적 유물을 전시하고 있다. 우리 선인들의 숭고한 민족정신과 광복활동을 길이 선양 전승하고 자라나는 후손들의 올바른 국가관을 확립하기 위하여 시민의 뜻을 모아 건립한 기념관이다.
서구열강의 무력에 굴복하여 문호를 개방한 일본은 자신들이 당한 똑같은 방식으로 조선에 개항을 요구했다. 운양호를 끌고와 조선의 해안에서 함포 사격으로 위협한 후, 1876년 조선과 강화도 조약을 체결했다.
강화조약은 일본의 조선 해안 측량권 인정, 개항장에서의 일본인 거류지 설치와 조선에 거주하는 일본인의 치외법권 인정, 무관세 무역과 일본화폐 사용 인정 등의 내용이 담긴 불평등한 조약이었다. 일제는 부산의 개항을 시작으로 대륙진출을 위한 교두보를 확보하였다. 그러나 일제의 이러한 침략에 대해 부산인들은 저항으로 맞섰다.
1876년 4월 일본군함이 동래부에 들어와 탐색하러 하자, 남문 일대에 모여든 군중들은 가윗장과 돌을 던지며 투석전을 벌였다. 9월에는 관세권에 대한 불평등 관계를 타파하기 위해 동래부민들이 일제에 맞서 싸웠으며, 1883년 5월에는 임오군란의 영향을 받은 동래민란이 발생했다.
1884년 19월 쌀판매 거절사건, 1886년 선창가 투쟁사건 등 끊임없는 항일운동을 전개해 나갔으며 부산 감수소 여인 납치사건에 집단적으로 저항하기도 했다. 이런 저항사건은 모두 개항과 일본 전관 거류지 설치를 반대하는 주민들의 항일감정이 폭발한 것이다. 1910년 우리 국권을 강탈한 일본은 모든 자유를 박탈하고 헌병 경찰을 앞세운 무
단지배를 자행했다.
부산지역의 3.1운동은 학생층과 부르주아층의 주도로 노동자, 상인 등 광범위한 계층의 참여하에 이루어졌다. 시위 횟수는 전국에서 경기도와 황해도 다음으로 높았으며 사상자와 관공서 파괴 등이 많이 일어났다. 부산의 항일정신이 어떤 지방보다도 높았다. 부산 광복기념관은 이런 자료를 보여주고 있다.
부산의 일신 여학교 학생들은 선도적 역할을 했다. 학생 이명사가 연락을 담당하였으며 주경애, 박시연 선생은 부산상업학교 학생들과 연락을 취하고 일신여학교 동료교사들을 규합했다. 어린 소녀들의 항쟁은 부산 경남 운동의 효시가 되었을 뿐 아니라 독립운동 사상 그 의의가 높다.
비밀결사 조직은 1910년 부산상업학교 학생 변상태, 최기택 등 6인이 결성한 대봉회와 1915년 부산상업학교 재학생 오택과 박재혁 등 10여 명이 결성한 구세단으로 주도적 역할을 하였다. 1940년에 일어났던 부산 공설운동장에서의 부산항일 학생운동(노다이 사건)의 영향으로 1942년 동래중학생들의 조선독립당과 1944년 부산진보통학교 졸업생들의 순국당 등 비밀결사가 태동되었다.
노다이 사건의 전말
국채보상운동은 1905년 을사조약에 의해 일제에게 국권을 빼앗기고 국권회복운동이 절정을 이루었던 시기에 애국 계몽운동의 일환으로 전개된 범국민적 저항운동있다. 이 운동은 일제가 우리나라에 침략정책의 일환으로 비려준 차관 1,300만원을 상환하여 경제적 독립을 이룩하고자 한 것이다.
2천만 국민이 3개월간 금연하여 그 대금으로 한 사람당 매월 20원씩 저축하여 국채를 상환하자는 것이었다. 부산에서도 '좌천리 감선의연 부인회' '영도 국채보산 부인회' 등이 조직되었다. 부인들은 조석으로 반찬값을 아껴 매일 서너푼씩 절약하여 국채보상금에 연조하자는 취지서를 발표했다.
노다이 사건으로 불리는 부산항일학생운동은 1940년 11월 경상남도 전력증강 국방경기대회(군사훈련을 겸한 체육대회)에서 일본학교를 우승시키기 위해 민족 차별적 심판을 하데 대한 불만이 계기가 된 사건이다.
모의 야영전투훈련 기간 중 심판장이었던 노다이는 조선인 학생에게 일부러 고된 산악훈련을 시키는 등 편파적 훈련을 진행했다. 경남 전력증강 경기대회에서는 전년도 1회 우승교인 동래중학을 제치고 일본인 학교인 부산중학교를 제일 먼저 입장시켰으며 동래중학이 경기에서 1위를 차지하면 트집을 잡아 재시합을 시키거나 반칙이라고 떼를 쓰는 등 악랄한 수법으로 성적을 부진하게 하였다.
최종 종목인 무장행군 경주에서는 우승 유력 학교인 부산2상을 일부러 가장 불리한 코스에 배치시켰고, 부산2상이 1위로 달리자 반칙을 선언하여 결국 우승을 못하게 하였다. 이러한 민족적 차별에 두 학교 학생들은 울분과 의분을 참지 못하여, 폐회식 마지막 식순인 일본 국기 하강식 때 일본 국가 대신 우리 애국가와 아리랑을 불렀고 '노다이 죽여라' '왜놈 죽여라' 고 절규했다.
1,000여 명의 양교생들은 시위행진을 벌이고 4,5학년을 중심으로 하여 약 400명의 학생들은 노다이 관사를 습격하여 외등과 유리창을 모조리 깨어버렸다. 노다이 사건을 불과 하루의 항일투쟁이었으나 엄중한 일제의 보도 통제 속에서 우리 학생들의 민족정기는 전국에 널리 알려졌다.
1920년에 노동공제회가 출발하고 사회주의자들이 침투하여 '공제'라는 기좐지를 통해 노동자의 의식이 서앙하면서 활발한 노동쟁의가 이어졌다. 그 횃불은 1921년 부산에서 점화됐다. 당시 부산에는 일급 노동자를 합해 3만여 명이 노동자였다.
이들은 일본인이 경영하는 택산형제상회와 총독부가 관리하는 통운회사와 상선회사 등에 고용되어 물자를 날랐다. 만주와 조선에서 일본으로 실어나르는 물자는 부산역에서 부두로, 일본에서 들여오는 물자는 부두에서 부산역으로 움직였다.
이들은 대개 일급 노동자로 하루 1원 꼴의 품삯을 받고 한달에 최고 15일 정도 근무했다. 고요주는 일거리의 많고 적음과 쌀값에 따라 품삯을 마음대로 올리기도 하고 내리기도 했다. 열악한 노동조건을 알게 된 영도의 노동야학교 교사 손영표 등은 노동자 대표를 선동하여 파업을 벌이기로 했다.
1930년대의 노동운동도 주목할 만 하다. 1930년 1월 10일 조선방직회사 근로자들의 파업항쟁을 시작으로 항일노동운동은 1930년대 중반 일제가 중일전쟁을 준비하기 위해 전조선에 동원체제를 구축함으로써 합법적인 근로대중의 항일운동이 사실상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근로대중의 일제집단에 대한 항거는 우리 만족의 저변에 깔려있는 자주정신의 표출이며 반제 반일의 민족감정이 잘 드러난 민족의식의 성장으로 볼 수 있다. 또한 중일 전쟁 이후 일본이 국가총동원령을 위시한 각종 악법을 제정하여 노동운동을 원천적으로 봉쇄, 탄압하였으나, 근로자들의 산발적인 저항은 꾸준히 지속되었다. 부산 광복기념관에서 그 역사를 한눈에 배울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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