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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풍경 기행
실크로드 여행 돈황 본문
돈황 막고굴이 명소가 된 내력
동서양이 통하는 길을 실크로드라고 명명한 사람은 1877년 독일의 지리학자 리히트호펜이다. 이 길이 처음 열린 것은 기원전 2세기 한무제 시대의 장건에 의해서였다. 비단길은 몇 가지 루트가 있지만 지정학적으로 가장 많이 어급된 것은 장안(서안)에서 콘스탄티노플(이스탄불)까지의 사막길이다.
이 길은 중국의 비단, 종이, 도자기 등이 건너간 상품의 길이자 문화교역의 길이었다. 서양을 중심으로 대륙을 가로지르는 바닷길이 개척되면서 비단길은 세계사에 무대에서 사라지다시피 했다. 이 길이 다시 주목을 받기 시작한 것은 19세기 말부터 본격화된 서구 제국주의의 자원 확보와 식민지 개척 때문이었다.
실크로드 여행지 돈황에는 수많은 보물들이 잠자고 있었다. 돈황은 가장 빛나는 보석이었다. 일본의 소설가 이노우에 야스시(井上靖)는 돈황석굴 장경동의 경전더미에 얽힌 장대한 이야기를 소설로 썼다. 소설을 보고나면 돈황을 훌쩍 떠나고 싶어진다. 내가 돈황을 찾은 것은 1999년 초봄이었다. 돈황에는 아직 잔설이 남아 있는 곳도 있었다.
돈황은 중국 서북단의 변경도시다.
불상 안치 사연
이곳에서 열리는 시장은 캐러밴이 옥문관을 통과해 중앙아시아로 나아갈 때, 식품과 물을 공급받는 마지막 오아시스였다. 옥문관을 지나면 사막이 나타난다. 여행길에서 죽음은 일상의 그림자처럼 늘 따라다녔다. 여행자는 불안과 공포에 젖어 돈황의 석굴 사원에서 무사함을 비는 예불을 올렸다.
돈황 석굴은 명사산 기슭 암벽에 분포한 550여 개의 석굴이다. 한 승려가 이 석굴에 1천 존의 부처님을 안치하기로 대불사를 세웠다. 승려는 순례자에게 안전한 귀향을 위해 석불을 존치하고 예불로서 봉헌할 것을 설득한다. 그후 세속의 평화와 내세의 구원을 바라는 이들이 불상을 깍아 봉헌하기 시작해 석굴 사원이 하나씩 늘어나기 시작했다.
원나라가 망하면서 이 석굴은 사람들의 관심에서 멀어졌다.
11세기 돈황 막고굴의 한 동굴에 문서를 넣고는 밀봉했다. 세월이 흘러 경전이 잠자고 있는 장경동이 우연히 발견됐다. 1900년 왕원록이라는 도교 도사가 이곳을 찾아와 숙소로 사용했다. 굴속에서 벽에 먼지를 긁어내다가 벽을 걷어내고 수많은 문서 두루마기를 발견했다. 왕도사는 이를 돈황 현청에 신고했으나 관리들도 별 관심이 없었다. 왕도사는 경전과 탱화 등을 헐값에 팔아치웠다.
이 소식을 듣고 여섯명의 발굴꾼들이 탐험이라는 명목으로 달려들었다. 영국, 스웨덴, 독일, 프랑스, 미국 등 서양제국과 마지막으로 일본의 한 오타니 고즈이 백작이 달려들었다. 영국의 오웰 스타인은 거금을 왕도사에게 주고 6천여 권의 경전을 상자에 넣어 낙파 40필에 실어 반출했다.
프랑스인 폴 펠리오는 중국한 권위자로 1908년 왕도사를 설득하여 5천권의 경전을 열 량의 차로 싣고 나갔다. 청나라 정부는 1910년에 이르러 유출을 막는 조치를 취했다. 문서를 북경으로 옮기는 과정에도 사라졌다. 이곳에서 발견된 유물은 4만 점이 넘었다. 일본과 러시아 발굴단이 도착했을 때는 매물로 나온 사본이 남아 있었다. 신라 스님이 쓴 왕오천축국전도 이곳에서 발견되었다.
불교 문헌이 90% 이상을 차지하고 도교 지리서 역수서 의약서 등도 포함되어 있다. 문헌은 5세기에서 11세기에 걸친 보물들이다. 이들 문헌들은 종이 외에 죽간 목독이나 비단에 쓰인 것도 있었다. 문자도 한어 외에 티베트, 소그드, 위구르 등 다양한 언어로 쓰여졌다. 막고굴의 중요 문서는 사라졌지만 학계의 지속적인 관심으로 돈황학이 탄생했다.
한국 박물관의 돈황 유물
한국의 국립중앙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중앙아시아 미술품도 벽화 60점을 포함하여 조각, 공예품 등 1700여 점에 달한다. 역사학자 박한제 교수는 이 유물들이 일본의 오타니 수장품이라고 주장한다. 그는 '박한제 교수의 중국 역사기행'을 통해 이 유물들이 우리나라에 남겨지게 된 사연을 소개한다.
오타니는 일본 전토진종 본파의 정신적 지주였다. 그는 불교가 전래된 경로를 탐사한다는 명목으로 비단길 탐사단을 세 차례 파견했다. 대원들에 의해 세번째로 큰 규모의 수집품이 반출되었다. 오타니가 재정 압박에 시달리면서 그의 저택을 유물과 함께 처분해버렸다. 이 저택을 인수받은 부호가 당시 조선의 채광권과 교환하는 조건으로 조선총독부를 통해 서울의 박물관에 기증했다. 오타니 유물의 약 3분의 1이 한국에 남게 됐다고 한다.
이노우에 야스시의 '돈황'을 읽다보면 마치 사실인 양 작가의 해박한 돈황 지식에 푹 빠지게 된다. 소설의 무대는 송나라로 주인공 조행덕은 과거 보러 왔다가 낙방한다. 그는 서방의 서하국에 관심을 갖고 외인부대에 투신한다. 전쟁으로 세월을 보내다가 불교에 귀의한다. 서하국이 돈황 공격을 시작하자 경전들이 경전들이 어느 한 굴에 감춰진다.
일본의 소설가인 마쓰오카 유즈루가 1937년에 쓴 소설 '돈황 이야기도'도 중국 돈황의 막고굴에서 발견된 고문서를 둘러싼 서구 열강 탐험가들이 펼치는 각축전을 소설적 구성으로 풀어냈다. 돈황 막고굴에서 우연히 발견된 엄청난 양의 고대 경전과 불상을 둘러싸고 약탈군들이 벌리는 문화침략을 다룬 작품이다. 돈황 문물 유출 경위를 스타인, 펠리오, 다치바나 그리고 그 사이에서 농락되는 왕도사를 중심으로 들려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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