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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풍경 기행
강제동원역사관의 사진 한 장 본문
국립일제강제동원 역사관에서 만난 사진
부산에 있는 국립일제강제동원 역사관에 걸려 있는 이 사진의 잔영이 아직 뇌리에 남아 있다. 사진의 주인공은 일제 식민지 시절 징병에 끌려가기 전에 가족사진을 찍었다. 이 사진이 생전에 마지막 모습인 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비장한 심정이있을 것이다. 그가 어느 전선에서 전사했다면 유골이 되어 부산역에 도착했을 것이다. 산화한 부산 출신 용사들을 위해 합동 고별식과 위안대회를 치렀을 것이다. 이 사진 한 장이 식민지 시대 짓밟힌 청춘의 역사를 침묵으로 대변하는 것 같다.
1938년 2월 일제는 육군특별지원병령을 공포하고 6개월 훈련코스를 정했다. 옛 훈련원 자리에 임시 지원병훈련소(서울 운동장 자리)가 착공되어 이해 9월에 준공되었다. 다음해에는 모집이 활발하게 이루어져 양주군에 훈련소를 개설했다. 이에 평양, 시흥에도 훈련소가 들어섰다.
조선총독부는 조선인을 군대에 동원하는 것은 천황의 은혜라고 선전하고 윤치호 등 친일인사를 동원하여 우리의 열망이 이루어졌다고 떠들며 지원병으로 나설 것을 독려했다. 군대에 갔다오면 우선 순위로 순사에 채용한다는 미끼를 던지기도 했다. 직장이 없던 청년들은 만주와 중국으로 보내준다는 말에 지원을 시작했다. 얼마 후에는 전쟁터로 보낸다는 소문에 지원병을 기피하여 강제로 정원을 채울 수 밖에 없었다.
지원병은 처음에는 조선주차군에 배치되었다가 차츰 만주와 중국 본토로 보내졌고, 태평양전쟁 시기에는 동남아시아와 남양군도 등에 배치되었다. 1938년부터 1943년까지 전면적 징병제가 실시되기 전까지 1만 6830명이 전쟁터로 나갔다.
일제는 1938년 육군특별지원병령 공포를 시작으로 조선 청년들을 특별지원병 형태로 동원했다. 1944년부터는 강제로 징집하였다. 해방될 때 까지 병사로 동원된 조선인은 21만명에 이른다.
일제는 1940년대 들어 병력부족에 시달렸다. 미국 영국와 전쟁을 하면서 조선인 병력동원이 불가피해지자 전선에서 일본군에게 총을 겨누지 않게 하려는 목적으로 황민화 교육을 강화하고 언제든지 조선인을 끌고갈 수 있도록 조선교육령을 개정했다.
특별지원병은 원래의 의미와는 달리 개인의 자유의사에 따른 것이 아니었다. 지원은 형식에 불과했고 실제로는 지역별 할당과 유력자의 선동과 회유, 관공서와 경찰의 협박이 뒤따랐다. 학도지원병의 경우에는 전문학교 재학 이상 대상자 중 96%가 지원서에 서명한 것으로 확인되었다. 지원을 거부한 사람은 강제로 수용되어 군사훈련과 사상교육을 받았고, 이후 응징학도라는 이름으로 한반도 내 여러 작업장에서 노역을 강요당했다.
자살 특공대
자살 특공대는 별도의 구명 장치 없이 연한군측 군사시설이나 장비에 돌진하여 공격하는 부대였다. 1944년 10월 필리핀 레이테 만에 처음 등장한 해군의 가미카제 특공대가 대표적이다. 그외도 글라이더형, 보트형, 어뢰형 등이 있었고 몸에 폭탄을 안고 직접 전차에 뛰어들도록 강요된 특공대도 있었다.
일제는 일본인만을 대상으로 규정되어 있던 병역법을 개정하고 대상자의 실제 주소를 파악했다. 징병 기피자는 3년 이하의 징역데 처하도록 규정하는 등 조선인 청년을 사지의 전장으로 내몰았다. 전쟁 말기에는 본토결전 준비를 위해 추가로 끌려간 사례가 많아 군인으로 동원된 조선인은 최대 40만에 이를 것으로 추정된다.
군무원은 일본 육 해군에 소속된 민간 인력이다. 군인은 아니었으나 최전선 군사시설 건축에 동원되는 경우가 많아 군인 못지않은 피해를 보았다. 당시에는 군속, 군부, 군요원으로 불리웠다. 이들은 국민징응령 및 각종 규칙에 따라 동원되었고 중서부 태평양 지역에서는 현지 채용방법도 활용되었다.
군무원의 관리체계는 노무자와 달랐으나 포로감시원 등을 제외하면 업무 내용은 노무자와 차이가 없었다. 노무자로 동원되었다가 신분이 바뀌거나 선박 징발과 함께 선원이 군무원이 되는 경우도 있었다. 동원 당국도 노무자와 군무원을 공문서에서 혼용 등재하는 등 관리 체계도 명확하지 않았다.
일본은 아시태평양 전쟁 기간에 해외 동원지역 중에서 조선인이 가장 많이 동원된 곳이다. 당시 일본으로 동원된 사람은 102만 명(노무자와 군무원) 이상으로 알려졌다. 국가총동원법, 국민징용령, 조선인노무자 내지 이주에 관한 건을 비롯한 각종 법령과 규정, 통첩에 따라 일본으로 동원된 노무자는 에너지원이나 원료 생산의 탄광과 광산, 터널, 도로,댐 등의 토목공사, 군함건조, 총기제조, 군복, 군호 생산의 군수공장에 배치되었다.
특히 일본 본토는 전쟁에 필요한 군수물자를 만드는 공장이나 탄광과 광산이 많았고, 조선인 군인 배치비율이 낮아 노무분에 동원되는 피해 규모가 압도적으로 컸다. 일본 지역 노무동원 작업장은 약 3,00개 소에 이른다.
해방 후 사할린 억류 조선인
일제는 러일 전쟁의 승리로 북위 50도 이하의 남사할린을 차지했다. 이곳은 석탄과 목재 등 자원의 보고이자 소련과 대치한 국경지대였다. 쿠릴 열도는 태평양 방어의 전략적 거점이다. 이곳에 동원된 대다수 농민 출신의 조선인은 전쟁수행에 필수적인 원료 생산 현장과 군사시설 현장에 배치되어 혹한의 기후와 불의의 사고, 민족차별, 배고픔 등과 싸워야 했다. 소련 접경 지역과 비행장 건설에는 군인과 군무원으로 동원된 조선인도 포함되어 있었다.
해방이 되자 남사할린이 소련의 영토로 귀속되면서 강제동원 피해자를 포함한 4만여 명의 조선인은 귀환하지 못한 채 발이 묶였고, 이 때문에 1990년 한러 수교 이후에야 귀환의 길이 열리게 되었다.
일제는 만주국을 세워 시베리아 일대를 노릴 수 있는 발판을 마련했다. 소련과의 전쟁에 대비하여 북만주 일대에 대규모 농업이민을 전개했다. 이에 따라 1935년 이후 조선인 약 24만명이 집단 이주했다. 이들은 중일전쟁이 시작되어 전선이 확대되자 전쟁동원을 피할 수 없었다.
중국의 주요 전선은 만주 전체 지역을 비롯해 중국의 16개 성과 남쪽의 하이난섬을 포함한다. 조선인은 이 지역에 군인, 군무원, 노무자, 위안부로 동원되었다.노무자는 군사요새와 비행장, 수력발전소,공장과 탄광 등에 동원되었다. 타이완에는 4천명에 가까운 조선인 군인과 군무원이 배치되었과 그중 452명이 사망했다.
중국 관내에 주둔했던 일본군에도 많은 조선인이 군인으로 동원되었다. 일제는 중국 관내 지역을 북지, 중지 남지로 나누고 각 방면에 지나 파견군을 주둔시켜 침략전쟁을 수행했다. 군인으로 동원된 조선인 역시 지나파견군 예하의 각 부대에 배치되었다.
소설가 고 이병주씨는 1944년 학병으로 동원되어 중국 소주 전선에서 투입되기도 했다.
중일전쟁 개전 이래 일제는 지속적으로 조선인을 중국 전선에 동원했다. 패전 때까지 최소 2만 5천여 명 이상의 조선인이 이 전선에 동원된 것으로 파악된다. 일부는 부대를 탈출, 국민당 중앙군이나 팔로군에 소속되어 해방 때까지 항일 독립 투쟁을 전개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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