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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풍경 기행
용산 전쟁기념관 관람정보 본문
고난을 극복한 호모 사피언스의 기록
용산 전쟁기념관 관람정보 하나하나 살펴보면 6.25전쟁 전개과정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역사를 다룬다. 기념관의 사진이나 유물에만 시선을 두고 주마간산격으로 지나가다보면 기억에 남는 것이 없을 것이다.
1950년 6월 25일, 북한군은 38선 전체에서 대대적인 무력 남침을 시작했다. 국군을 최선을 다해 맞섰지만 최신형 전차를 앞세운 북한군의 맹렬한 공격으로 수도 서울은 3일만에 점령당하고 말았다. 국군은 한강 남쪽까지 철수해 방어선을 구축하고 유엔군이 도착할 때까지 북한군의 남진을 저지하였다.
북한은 1948년 11월부터 전쟁 직전까지 게릴라 2,400여 명을 남한에 침투시켰고, 이를 진압하느라 국군의 전려이 분산된 탓에 전쟁시에는 38선을 방어할 병력이 부족하게 되었다. 이와 같이 공산세력은 전쟁을 일으키기에 앞서 남한 내부에 혼란을 일으켜 전투력의 소모를 유도했다.
북한군은 소련 군사고문단의 지도를 받아 남한을 침략하기 위해 선제타격 작전을 완료했다. 6월 12일부터 공격을 위한 부대 이동을 시작하여, 남침 명령이 내려진 6월 22일에는 이미 전 부대가 전쟁준비를 마치고 전선에 대기하고 있었다.
당시 국군은 노동절, 국회의원 선거, 위장평화공세에 대응한 비상경계령으로 극심한 피로에 시달리고 있었다. 농촌에서 일손마저 부족해지자 육군본부는 6월 24일 비상경례령을 해제하여 많은 장병들의 외출을 나갔다.
전쟁 직전 대부분의 부대에는 반 정도의 병력만 남게 되었다. 그날 밤에는 장교클럽 개관식이 열려 새벽녁에 연회가 끝났다. 북한군의 남침사실이 알려진 당일에는 군 수뇌부 등 장교 대부분이 늦잠에 빠져 있었다.
3일 만에 서울 함락
북한군은 서울을 1차 목표로 김포, 문산, 의정보, 홍천 등 4개 방향에서 공격해 왔다. 김포비행장과 서울의 주요 시설에 대한 폭격도 감행했다. 군 수뇌부는 사단들을 출동시켜 서울을 지키고자 했다.
서울 북쪽 방어선이 무너지면서 3일만에 서울이 함락되고 말았다. 동해안에서 북한군은 양양 강릉 방향에 대한 공격과 해상을 통한 상륙작전을 감행했다. 북한군의 해상침투부대가 부산으로 향하였으나 대한해협에서 국군의 백두산함에 의해 침몰됨으로써 후방이 위협받는 상황은 피할 수 있었다.
북한군의 T-34 전차는 국군에게 괴물과 같은 존재였다. 6월 26일 의정부 북쪽을 방어하기 위해 포병 교도대대를 이끌고 출동한 김풍익 소령은 105mm포 사격으로 전차를 막지 못하자 대원들과 함께 산화했다. 이로 인해 일시적으로 적을 격퇴할 수 있었다.
춘천을 방어하던 심일 소위는 57mm 대전차포 사격에도 적의 자주포가 파괴되지 않자, 특공대를 조직해 포탑에 화염병과 수류탄을 던져 넣어 자주포 3대를 파괴하고 적을 물리쳤다.
북한군 전차가 서울에 진입하자 육군본부는 한강 남쪽에 방어선을 형성하기 위해 한강 다리를 폭파했다. 국군은 소형화기만 휴대한 채 소부대 단위로 강을 건넜다. 철수한 병력이 어느 정도 집결한 6월 29일, 시흥지구 전투사령관 김홍일 소장은 병력을 재편성하여 영등포,노량진, 신사리 지역에 각각 부대를 배치하였다.
북한군은 부분 파괴된 한강철교를 수리하여 전차를 건너 보래려고 하였으며 국군은 미 공군의 지원을 받아 북한군의 도하를 막았다. 북한군은 7월 3일 철교를 복구해 전차를 진출시켰다. 방어선은 6일 만에 붕괴되었지만 미 지상군이 파병될 수 있는 시간적 여유를 확보할 수 있었다.
계급 없는 학도의용군
낙동강 방어선은 마산-왜관-영덕을 잇는 총 연장 240km의 방어선이다. 국군과 유엔군은 연결된 방어선을 구축해 어깨를 나란히 하고 북한군을 막아낸다. 북한군은 부산 점령을 목표로 14만 여명의 병력을 동원해 대대적이 공세를 펼쳤다.
8월 5일부터 시작된 낙동강 방어전투에서는 국군과 북한군 사이에 국가의 운명을 건 치열한 공방전이 벌어졌다. 북한군은 9월 공세를 시작하면서 낙동강 교두보를 확보하고 전세 역전의 발판을 마련할 수 있었다. 낙동강 방어전투는 군인, 경찰, 노무자, 여성들도 참천한 국민 총력전이었다.
6월 26일, 북한의 남침소식을 들은 미국의 트루먼 대통령은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소집을 요청했다. 뉴욕 유엔 본부에서 열린 안보리 회의에스는 미국이 제안한 북한군의 적대행위 즉각중지와 이북으로 복귀를 요구하는 결의문을 채택했다.
북한이 이를 무시하자 6.28 제2차 합의회에서는 북한군을 침략자로 규정하고 회원국에 남한을 도와 무력공격을 격퇴할 것이라는 권고하는 결의안이 통과되었다. 미국이 가장 머저 해 공군과 지상군을 지원하고 다른 유엔 회원들과 잇따라 지원을 약속했다.
미 지상군의 참전으로 겨우 한숨 돌리게 딘 국군은 철수한 부대들을 재편성하여 중동부 전선을 관할한다. 7월 8일 충북 음성 동락리 전투와 경북 상주 화령장 전투의 승리는 계속되는 후퇴에 지친 아군과 국민들에게 희망을 안겨 주었다.
학도의용군은 전쟁 당시 조국을 위기에서 구하기 위해 학업을 중단하고 스스로 참전한다. 의용군은 6월 29일 수원에 모인 200여 명의 학생들이 국방부 정훈국의 후원으로 조직한 비상학도대에서 출발했다. 이후 참전한 학생들은 전투요원 5만여 명, 후빙지원요원 20만 명등 총 30만여 명에 달한다. 이 가운데 7천여 명은 군번과 계급도 없이
싸우다가 장렬히 전사했다. 1951년 2월 학도의용군이 해산된 이후, 일부 학도병은 정식으로 입대하여 계속 전선으 지켰다.
맥아더 장군의 등장
맥아더 장군은 6월 29일 한강 방어선을 시찰하면서 인천상륙작전을 구상했다. 인천항은 서울에 인접해 있어 그 중요성이 높다. 수로가 좁고 조수간만의 차가 심해 대규모 함대의 이동이 어려운 조건이다. 미 합동참모본부는 작전을 반대했다. 맥아더는 전략적, 심리적, 정치적인 이유로 서울을 단시일 내 탈환하기 위해서 인천에 상륙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참모부는 인천상륙작전인 크로마이트 작전계획을 승인했다. 9월 12일부터 적을 교란하고 고립시키기 위해 인천과 주요 항구에 폭격이 가해지는 가운데 7만 5천명의 상륙병력을 탑승시킨 261척의 함정이 부산항 및 일본을 출발했다. 9월 15일 새벽 2시 팔미도 등대가 밝혀지면서 상륙작전이 결행되었다.
인천에 상륙한 국군과 유엔군이 서울을 향해 진군해 오자 북한군은 크게 당황했다. 미 해병 1사단과 국군 해병대는 김포비행장을 탈환한 뒤, 행주나루와 여의도, 서강 방향에서 한강을 건너, 일부는 서울 북쪽을 차단하고 중앙청 방향으로 공격했다.
북한군은 완강하게 저항하였으나 아군은 항공기와 포병의 압도적인 화력지원 덕분에 적을 제압할 수 있었다. 서울을 포위한 한미 연합군은 9월 25일 오후부터 시가전에 돌입했다. 치열한 전투 속에 9월 27일 오전 6시 국군 해병대가 중앙청에 태극기를 게양했다. 아군을 석 달 만에 수도 서울을 되찾았고, 다음날 정오 국회의사당에서 수도 탈환식을 거행했다.
북한은 전쟁 초기부터 6천여 명에 달하는 선전 전문요원을 곳곳에 배치해 전쟁의 책임을 남한에 덮어씌우고 북한 체제의 우월성을 선전하는 데 총력을 기울였다. 국군도 전쟁 초기 수원으로 철수한 후 민심을 수습하기 위해 심리전을 시작했다. 벽보와 가두방송으로 국민들에게 행동지침을 전달하고 유엔군 참전, 전투 승리 등을 선전했다.
국군과 유엔군의 심리전이 공세로 바뀐 것은 반격작전 이후부터다. 유엔군은 인천상륙작전 직후 북한군이 퇴각할 때 500만 매 이상의 전단을 살포하였고, 그 결과 많은 포로가 투항을 결심했다. 북진작전이 시작되면서 북한의 민사 심리전이 중요한 과제로 부각되자, 국군은 심리전 전담부대를 창설해 사기 진작 및 대민선전활동을 담당하도록 했다.
삐라는 선전이나 선동적인 글을 담은 전단지를 말한다. 라디오 같은 전파매체가 대중화되어 있지 않던 6.25 당시에는 항공기나 포탄 등을 이용해 뿌려진 삐라가 요즘의 텔리비전같은 역할을 담당하였다. 삐라의 내용은 적 지도층을 비방하고 죽음에 대한 공포, 가족을 향한 그리움 등을 자극해 전의를 떨어뜨리거나 항복을 권유하는 것이 주류를 이룬다. 이 삐라는 전쟁 기간 동안 총 28억 장이 한반도에 뿌려지며 심리전의 핵심 수단으로 활용되었다.
중국의 모택동은 전쟁 발발 이전에 김일성과의 회담에서 미군이 참전하면 북한을 지원하겠다고 약속했다. 국군과 유엔군이 38선을 돌파하여 압록강과 두만강을 향해 파죽지세로 진격을 계속하자 중국은 김일성의 요청을 받고 소련과의 긴밀한 협의하에 전쟁에 참전했다. 공세를 펼치던 국군과 유엔군은 철수하게 되었고 통일의 꿈은 다시 한 번 좌절을 겪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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