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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 인물기행/제갈공명2

차이나리 2018. 2. 11. 20:35

삼국지 인물기행/제갈공명2

 

이런 분위기 속에서 때로는 제갈공명이 화제를 제공하기도 했다.

자네들은 관리가 되면 한 주의 자사나 군의 태수 쯤 되겠군.”

친구들이 공명에게 질문을 던진다.

그럼 자네는 어디까지 출세를 할 건가?”

 

공명은 빙그레 웃기만 할 뿐 대답을 피했다. 사실 그의 소년기는 별로 알려진 것이 없다. 그가 태어난 것은 후한 말, 황건적이 난이 발발하기 4년 전이다. 황건적이 난이 시작됐을 때 제갈공명은 3, 조조는 29, 유비 23, 관우 22, 장비 16, 손권 2, 주유 9, 사마중달은 5살의 나이였다. 융중이야말로 제갈량의 청년시절 첫 흔적을 남긴 곳이다.

 

삼국시대를 황건적의 난 발발부터 위나라의 멸망까지 잡으면 184년부터 280년으로 약 100년에 해당된다. 위나라 촉나라 오나라의 세발솥처럼 정립하던 시기를 기준으로 하면 222년부터 약 60년 동안의 기간에 해당된다. 제갈량은 10년간 융중에 기거한 까닭에 융중은 문화유적지가 됐다.

 

소설 삼국연의속에서 그는 완전무결한 인간이자 영웅이다. 소설 속에서 허구는 유적을 남길 수 없다. 그러기에 호북성 역사기행은 진수의 삼국지가 휠씬 더 사실적으로 도움을 준다.

 

소설 속에서 유비가 제갈량을 찾아간 때는 눈보라 치는 한겨울이었다. 따지고보면 소설 삼국지는 제갈량의 등장부터 극적인 구성을 갖추기 시작한다. 그래서 융중은 삼국지 스토리가 시작되는 곳이다. 호북사람들은 융중산 풍수가 제갈량을 십년간 천하기재로 키웠다고 말한다. 사람들은 제갈양의 지혜의 화신으로 여기고 있다.

 

우리 여행단 일행은 둘째날 양양고성 성채 위에서 한수(한강)를 바라보며 제갈양의 체취를 궁금해 했다. 버스는 양양에서 서쪽으로 13km를 달려 융중에 도착했다. 삼고초려와 융중대가 이루어진 곳이다. 삼고초려가 제갈량의 뛰어난 인물성을 말한다면 융중대는 뛰어난 지혜 그 자체다.

삼고당 앞의 동백 세그루

매표소를 지나 조금 올라가자 고융중이라 씌인 패방이 나타났다. 이 석패방은 1893년 호북성 제독 정문병이 세운 것이다. 따지고 보면 제갈량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이 패방에는 충()으로 대변되는 유교국가 중국의 자존심이 걸려 있는 셈이다.

 

고융중에는 둘러볼 만한 곳이 7군데가 있다. 제갈량의 초려, 궁경전(경작하던 밭), 육각정, 삼고당, 포슬정, 패방 그리고 무후사다. 가이드 설명에 의하면 제갈량이 마시던 우물만 제 자리에 있을 뿐 모두 정확한 위치는 아니라고 한다. 이 건물들은 주로 명대와 청대에 걸쳐 건설되고 중건되었다.

 

초려는 명나라에 세워졌고 청대에 중건됐다. 초려라는 이름도 제갈양 출사표 등장하는 삼고신우초려지중’(三顧臣于草廬之中)에서 유래한다. 육각정은 습착치라는 역사가의 상양기상양에 공명의 자택이 있는데 우물이 있다라는 저술에 따른 것이다.

 

습착치는 삼국지의 진수보다 앞선 사람으로 한씨춘추의 저자다. 진수는 촉나라 출생이지만 위나라에서 벼슬을 했다. 따라서 육각정만이 사실적인 기록을 따른 것이다. 장개석도 이 우물을 보수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삼고당은 유비가 세 번 찾았다는 뜻인데 제갈량의 융중대책 기념관이다. 삼고당 앞에는 동백 세 그루가 엉켜 있어 유비, 관우, 장비를 상징한다고 한다. 포슬정의 포슬은 무릎을 감싼다는 뜻이다. 제갈량은 융중 시절, 바위에 앉아 무릎을 감싸쥐고 양보음을 즐겨 불렀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그 바위가 포슬석이 되었고 청나라 강희제가 1719년에 포슬정을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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