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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풍경 기행
낙양성 십리하에 본문
중국의 고도, 낙양
낙양성에서 바라본 북망산천
중국 하남성 낙양은 역대 아홉 왕조의 고도로 알려져 있어 역사의 자취가 서린 곳이다. 현대에 들어서는 공업도시로서 자리를 잡아 공기가 그리 맑지 않았다. 낙양은 당나라 때까지 중원의 중심부였고, 역대 군둥들의 쟁탈지가 되거나 병란의 중심지가 되어 여러 차례 폐허가 되기도 했다.
중국인들은 예로부터 ‘살아서는 소주 항주에 있고, 죽어서는 북망산천에 간다’는 꿈이 있었다. 그 꿈을 이룰 수 있었던 것은 황제나 귀족에 불과했다. 북망 일대에는 후한 이래의 황제릉이나 귀족들의 분묘가 즐비하다. 최근에는 삼국지 인물인 조조의 무덤이 발견됐다는 소식도 전해진다.
망산에는 고묘박물관이 있다. 낙양 근교의 각종 분묘를 그대로 이축해서 한 군데 모아놓은 특이한 박물관이다. 지하의 전실묘를 하나하나 들여다보면 시대별로 고분의 형태가 다름을 알 수 있다. 박물관의 북서쪽에는 북위 선무제의 경릉으로 알려진 분구가 있다.
낙양 시내를 돌아다니다가 낙양성을 찾아갔다. 여경문을 통과해 성루로 올라가 북쪽을 바라보니 망산의 윤곽이 보인다. 우리 민요에 ‘낙양성 십리하에 높고 낮은 저 무덤은, 영웅 호걸이 몇 명이냐’라는 노랫말이 떠올랐다. 그 노랫말을 만든 사람은 이 낙양성을 와 보았는지 궁금하다. 성루에서 내려와 저자거리를 따라 식당이며 상점들이 늘어서 있었다. 관광지 치고는 생각보다 초라했다.
성밖을 나와 찾아간 곳은 마을 한 쪽에 큼직하게 서 있는 비석이었다. 공자가 주나라를 찾아가 노자를 만나 예에 대해서 묻고 즐거워한 장소임을 알리는 내용이었다.
낙양역에서 가까운 곳에 있는 지하 박물관은 병마갱으로 유명하다. 주나라 왕이 탔다는 육두마차 조각상이 웅장하게 서 있다. 이 마차는 그동안 문서로서만 확인되었으나, 직접 발굴되어 기록이 사실로 입증됐다. 지하에 들어서니 유리판 아래로 말과 마차가 흙더미에서 그 웅자를 드러냈다.
백마사와 관우사당
당나라 때는 물자의 유통이라는 점에서 장안(서안)보다 낙양 쪽이 지리적인 이점이 많았다. 강남에서 실어온 곡은 대운하와 황하를 거쳐 낙양으로 운반되었다. 낙양에서 장안으로 가는 길목에는 황하로 가면 암초가 있고, 육로로 가면 험난한 함곡관이 있어 운송이 쉽지 않았다고 한다. 낙양에서 오랫동안 곡물이 도착하지 않으면 귀족들이 먹을 것을 찾아 낙양까지 찾아갔다는 기록도 있다.
당대의 낙양에는 황제나 황후의 거주구가 장안이 아닌 서북쪽 한 모퉁이에 있었는데, 그 궁성 쪽에는 각지에서 온 곡물을 비축하기 위한 창고들이 있었고, 그 구역을 성벽으로 둘러싼 성처럼 되어 있었다. 면적이 42제곱킬로미터로 최대 1천톤 이상의 곡물을 저장할 수 있었다고 한다.
이 곡물창고는 동굴형이다. 건조한 황토지대에서는 이것이 최적의 저장고였다. 그 저장고가 250여 개 이상이 된다
고 한다. 옛날 수당 시의 낙양은 노성 일대에 해당된다. 삼국지 시대의 낙양성은 이보다 휠씬 동쪽, 백마사 서쪽 부근에 위치했다고 한다.
교외의 명소에는 사적이나 유구가 많다. 특히 백마사나 관림, 용문석굴 등은 관광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백마사는 후한 명제 시절인 서기 68년에 건립된 중국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건물이다. 인도에서 백마로 불전을 운반해온 두 승려를 창시자로 하는 사찰이다. 지금의 13층 전탑은 1175년에 세운 건조물이다.
남쪽 교외 7킬로미터 지점에 위치한 관림은 촉한의 장수였던 관우의 목이 묻혀 있는 곳이다. 관우는 사후에 황제보다 더 우월적인 지위를 얻었다. 그렇다고 해서 황제만이 사용할 수 있는 능이란 말을 못쓰고, 능과 발음이 비슷한 림을 사용했다고 한다.
경내에 위치한 관우사당은 명나라 이후의 건축양식이다. ‘한수정후관운장지묘’라는 묘비 또한 청조의 것이다. 좌우 낭하의 건물에 근교의 각 황제릉이나 고관의 묘 앞에 설치되어 있던 석상의 대부분이 함께 진열되어 있다.
관림을 지나 3킬로미터 정도 가면 낙하의 지류인 이허강이 강가 절벽 사이에 크고 작은 불상를 새겨 넣은 곳이 용문 석굴이다. 맞은 편 동쪽 산에는 당나라 시인 백거이의 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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