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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 인물기행/관우3 본문
삼국지 인물기행/관우3 시작
관우의 전설
번성 공방전부터 맥성 농성, 그리고 처형에 이르는 삼국지연의의 이야기 전개는 사실에 뿌리를 두고 있다. 하지만
관우 사후에 전개되는 이야기는 정사에서 많이 벗어나 있다. 이 무렵 조조는 나이가 들어 극도로 쇠잔해졌고, 여몽도 병이 깊어 관우 사후에 차례로 세상을 떠났다. 이 두사람의 죽음이 관우의 원혼 때문이라는 민간의 전설도 생겨났다. 관우는 죽어서 곧바로 복수의 염원에 불타는 귀신이 되어 인간이 아닌 신으로 사람들 앞에 나타난 것이다.
손권은 왜 관우의 머리를 조조에게 보냈을까. 당시 힘의 관계는 조조가 단연 우위에 있었다. 손권은 조조의 지령에 따라 움직이고 그 목적을 달성하자 증거를 보낸 것을로 해석된다. 손권으로서는 유비와의 동맹을 파기하고 조조에 따르겠다는 의사 표현이다. 관우의 죽음으로 조조는 큰 위험에서 벗어났다. 관우의 머리를 처음 봤을 때 조조는 단순히 기뻐하기보다는 착잡한 심정이었을 것이다. 관우의 머리가 도착하고 며칠 후에 조조도 죽음을 맞았다.
관우는 죽고나자 지역신이 되었다. 유비와 장비, 조운, 제갈량 등도 마찬가진인데 함께 신의 반열에 있었다. 하지만 당을 거쳐 송, 원, 명, 청대가 지나면서 관우 혼자만 대중적인 신으로 존재를 드러낸다. 관우는 충의의 화신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삼국지연의의 작가인 나관중은 관우와 같은 고향 사람으로 관우를 특별 대우하고 있다. 이것이 관우 신앙과 잘 맞아떨어진다.
관우 신앙은 수당 시대에 더욱 확산된다.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한 관우는 신으로서 일반인에게 받아들여지기기 쉬운 보편성이 있다. 극단적인 종교색도 가지고 있지 않아서 다른 종교에게 적대시되지도 않았다. 그 때문에 도교와 유교, 불교에서도 관우를 자신들의 영역으로 끌어들였다. 송대에 이르자 관우 신앙이 국교로 인정된다. 송은 북방 민족의 침략으로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여진족과 연대해서 눈엣가시였던 거란족을 멸망시켰지만 곧바로 금이 강력한 적대 세력으로 부상했다. 백성들은 나라를 구할 영웅을 기대한다. 이런 위기 샹황에서 백성의 지지를 기대하며 관우를 호국신으로 내세웠다. 송휘종은 관우에게 충혜공이라는 시호를 하사했다. 국가가 관우를 정치적으로 이용하면서 정교합일의 시발점이 되었다. 이후 역대 송의 황제들은 관우ㅇ게 승령진군, 의용무안왕, 장무의용무안왕 등 많은 시호를 내렸다.
원나라도 정책적으로 관우신앙을 확산시켰다. 원은 한민족을 교화하기 위해 관우를 활용했다. 명나라는 한민족이 원을 무너뜨리고 세운 왕조지만 역시 관우 신앙을 통치에 이용했다. 전재의 신으로서 관우의 신격을 고양시킨 것이다. 시호도 가장 긴 것으로 '삼계복마대제신위운진천존관성제군'이다. 관우가 드디어 황제의 반열에 오르게 된 것이다. 관우 신앙은 청대에 가장 번성했다.
죽어서 신이 된 관우
당시 북경에는 116곳의 관제묘가 있었으며 서태후는 삼국극을 보다가 관우가 등장하는 장면이 되면 일어서서 경의를 표했다고 한다. 이 시대의 관우 시호는 '충성신무영우인용위현호북보민정성수정익찬선덕관성대제'로 무려 26자에 이른다. 왜구와의 전투나 태평천국의 난을 진압하러 갈 때 적토마를 앞세운 관우가 허공에 나타나과 관제묘에서 빛이 뿜어져 나와 정부군에게 힘을 주엇다는 이야기도 생겨 나왓다.
중일전쟁 때도 관우와 관련된 전설이 생겨났다. 일본군이 운성 부근으로 진격하자 관우의 가묘에 그의 혼령이 나타났다고 한다. 일본군 사령관이 가묘에 들어가자 관우상에서 빛이 나며 '황하를 건널 수는 없다'는 소리가 들려왔다. 사령관은 묘 밖으로 나와 실신했다고 한다.
관우의 고향인 산서성은 고지대에 위치해 있어 농산물의 생산이 충분하지 않는 지역적 특성이 있다. 따라서 다른 지역과의 교역을 중시했다. 따라서 그들이 믿었던 관우도 상업신의 성격을 더하면서 각지로 퍼져나갔다. 주요 거래 품목은 소금이있는데 밀매를 통해 막대한 부를 축적한 비밀조직도 생겨났다. 이들은 전국적인 조직망을 구축해 다분히 폭력 조직의 성격도 가지고 있었다.
사업이 확장되자 상인들은 회합이나 숙박을 위한 장소로 회관을 만들었는데 관제묘의 성격도 가지고 있었다. 관제묘를 겸한 회관은 청대에 이르러 전성기를 맞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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