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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풍경 기행
부산 영선고개 본문
타임머신 타고가는 고갯길
영선 고갯길은 영주동 영주시장에서 대청동 코모도 호텔로 넘어가는 1.1km에 이르는 길이다. 지금 이 길은 역사의 뒤안길로 밀려난 한산한 길이 되어 버렸다. 이 길은 조선 중기 이후 근 현대에 이르기까지 부산항의 역사와 정신을 잘 간직하고 있는 특별한 의미가 있는 곳이다.
이 고갯길 언저리에는 조선 후기 한일 관계사에 있어서 성신교린의 정신이 깃들어 있다. 양국간의 무역과 외교 뿐 아니라 문화교류의 실질적 통로였다. 근대 부산항 개발의 역사도 이 고갯길에 고스란히 간직되어 있기도 하다.
영선고개라는 명칭은 영선산으로 인하여 불리워지게 되었다. 영선산은 이 고갯길의 해안 쪽으로 난 해발 40미터 가량의 두 산을 말한다. 조선 숙종 때 두모포 왜관을 초량왜관으로 이설할 때, 초량왜관을 건축하고 수리하는재목이 이 고개를 통해 운반되었다.
영선고개는 1909년 실시한 영선산 착평공사 전까지 초량에서 중구지역으로 통하는 유일한 통로였다. 당시 영선고개 길의 폭은 지금의 반 정도 밖에 되지 않는 우마차 하나 다닐 수 있는 길이었다.
영선고개는 1678년 초량왜관 신축이 완성된 이후 동래부의 관리드리 왜관을 드나드는 길이었다. 매월 3순의 3일과 8일에 조선 정부가 지정한 무역 상인이 일본인들과 자리를 같이 하여 시가를 논하고 교역을 위해 드나들던 곳이다.
왜관은 조선시대 일본인의 입국 및 교역을 위하여 설치한 장소로 조선속의 일본인 마을이었다. 조선시대 왜관의 역사는 조선에 도항한 왜인들이 무질서하게 그 영역을 확장하여 거주하는 것이 많은 물의를 일으키자 조선 태종 당시에 일본인이 장사를 할 수 있는 포구를 조선정부에서 부산포와 제포에 세워주었던 것에서 출발한다.
오늘날 초량이라 함은 부산역 일대를 일컫는 말이지만 구한말까지 초량은 용두산의 서쪽 충무동에서 지금의 초량 일대를 아우르는 곳이었다. 창건 당시 초량왜관은 용두산을 중심으로 동쪽의 동관 3대청과 서쪽의 서관 3대청은 주로 조선에서 운영하였고, 그 외 왜인들의 생활과 관련한 부속 건물들은 주로 왜인들이 운영했다.
초량객사는 지금의 용두산 일대로 1676년 동래부사 이건이 처음 세웠다. 초량객사는 여타 객사와는 달리 일본 사신들이부산에 도착하면 맨 먼저 접위관의 안내를 받아 이곳에서 조선 국왕의 전패에 숙배를 올리고 예물을 증정하는 등 숙배식이 이루어졌다.
대문 밖에는 좌우에 일본사신의 수행원들이 정렬해 있고, 대문 한층 높은 넓은 부지에 객사 건물이 있는데 정청 가운데 국왕의 전패가 보이고 그 좌우에 흑단령을 입은 동래부사와 부산첨사 등이 엄숙한 표정으로 바깥을 내다보고 서 있었다.
송림밭 사이로 갈매기 나는 해안
또한 왜관의 입구 수문 밖에는 매일 아침 시장이 열렸는데 이때 동래지역 상인들이 생필품 등을 가지고 드나들었다. 영선산 아래 해안에는 구한말까지 왜관에 공급할 땔감을 저장하던 시탄고가 있었고, 그 아래 바다에는 논치 어장이 있었다.
옛 영선산 위를 논치길이라 불리웠는데, 그 유래는 사병산에서 이곳으로 흘러내리는 계곡수가 있어 주변에 논밭들이 이었기 때문이다. 산 위에는 간해루라는 정자 한 채가 북항 바다를 조망하며 서 있었다.
개항(1876년) 전까지만 하여도 이 고개에는 소나무가 울창한데다 왜관과 관련하여 물의를 일으킨 자들에 대한 사형집행터가 있어 대낮에도 이 길을 드나드는데 다소 으시시하였다고 한다. 영선고개 입구에 해당하는 영주1동 주민자치센터 일대에는 초량왜관과 관련하여 동래부에서 설치한 부속 공관으로 훈도가 집무하는 성산당과 별차가 있는 빈일헌, 역관이 있는 유원관을 비롯하여 통사청, 통인방, 사령방 등이 있었다.
1934년 11월에 준공괸 우리나라 최초의 연륙교인 영도대교 가설공사 당시 우리나라 인부 17명이 희생됐는데, 그 희생자들을 위한 위령탑도 영선고개에 있었다. 개항 이후 관세 징수를 위한 해관이 설치되었는데 당시 해관장 관사도 이 고개에 있었다.
특히 러시아 영사관은 1904년 러일전쟁에 패한 이후 폐쇄되었지만, 그곳에 1924년 부산의 일본인 실업가들이 자본을 투자하여 만든 우리나라 최초의 영화사인 조선키네마 주식회사가 설립되었던 곳이다. 지금 그 위치는 바뀌었지만 영선고갯길에서 중앙동으로 난 40계단은 한국전쟁 당시 피난시절의 애환을 담고 있어 관광객들의 주목을 받고 있다.
영선고개에서 용두산 방향을 바라보면 원시적 해안을 간직한 부산항의 모습이 그대로 드러났다. 용두산 서쪽에 자리잡고 있었던 초량왜관 서관은 지금의 국제시장과 인접해 있었다. 당시에는 나즈막한 숲 속 구릉지대로 이루고 있었는데, 지금의 대청로 가로변에 노송들이 운치를 이루고 있었다. 이들 소나무들은 대마도에서 가져와 심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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