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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 인물기행/제갈공명4

차이나리 2018. 3. 17. 19:56

적벽대전

삼국지 인물기행/제갈공명4

 

"좋소"

이제 제갈공명은 유비의 휘하에 들어왔다. 관우와 장비가 은근히 시기를 했다. 그들은 유비와 결의형제 한 사이로 견마의 수고를 아끼지 않을 결심이었다. 죽을 때까지 함께 하자고 맹세한 사이가 아닌가. 유비는 제갈공명만 총애하는 것 같아 두 사람은 분개했다. 유비는 관우, 장비 두 사람을 불러 놓고 타일렀다.

 

"나와 공명의 관계는 마치 물과 물고기의 관계나 마찬가지요. 이 점을 이해하고 불평을 하지 말아주오"

 

서기 208년에 적벽대전이 일어났다. 조조의 남진은 실패로 끝나고 제갈공명의 천하삼분지계가 제일보를 내딛게 되었다. 유표에게는 두 아들이 있었다. 유표는 자기 후계자로서 후처인 채씨 부인이 낳은 차남 유종을 꼽고 있었다.

 

장남인 유기는 제갈공명에게 상담을 신청했다. 제갈공명으로서는 누구 편을 들 수 없어 난처한 입장이었다. 어느날 유기가 제갈공명을 고루로 유인했다. 두 사람을 술잔을 주고 받았다. 그런데 유기의 부하가 나타나 사닥다리를 치워 버렸다. 유기가 간절한 마음으로 입을 열었다. 제갈공명은 유기에게 한 수를 가르쳐 주었다.

 

"춘추시대 진나라 신생 왕자는 국내에 있다가 죽음을 당했고, 중이는 국외로 나갔기에 안전을 도모할 수 있었소"

 

 

공명은 유기에게 형주의 도읍인 양양을 떠나라고 권고했던 것이다. 유표가 죽자 차남인 유종이 그 뒤를 계승했다. 유종은 유비에게 말도 없이 형주를 내놓으며 조조에게 항복했다. 제갈공명은 양양의 유종을 공격하여 형주를 점령하자고 했다. 유비는 거절했다.

 

조조군과 유비군은 장판에서 격돌했다. 유비는 조운의 활약으로 처자를 되찾을 수 있었으나 공명의 친구인 서서를 잃고 말았다. 서서의 노모가 조조에게 붙잡혀 있었기 때문에 부득불 유비와 작별을 고하게 된 것이다. 조조는 강릉을 점령했다. 공명은 이대로 방치하면 손권이라 하더라도 유종처럼 조조에게 항복하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 자신이 생각한 천하삼분지계는 조조를 형주에서 몰아내느냐 못하느냐에 달려 있었다. 공명은 유비 앞으로 나아갔다.

 

"사태가 매우 급합니다. 명을 받들어 손장군에게 구원을 요청할까 합니다."

공명은 노숙과 함께 손권에게 달려갔다. 제갈공명이 먼저 입을 열었다.

 

"지금 조조가 군웅을 물리쳐 천하는 거의 평정되었습니다. 조조는 마침내 형주를 깨고 그 위세를 사방에 떨치고 있습니다. 유예주도 도망하는 꼴이 되었습니다. 장군께서는 이 사태에 대비하셔야 합니다. 속히 결단을 내리지 않으면 머지 않아서 화를 자초하게 될 것입니다."


손권이 물었다.

"그럼 유예주는 왜 조조를 섬기지 않으십니까"

"유예주는 왕실의 자손이요, 그 영매한 자질을 세상에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지금 일이 이루어지지 않는 것은 천명입니다. 어찌 조조 따위에게 굴복할 수 있겠습니까"

 

손권이 단호하게 말했다.

"나는 오의 땅과 백성을 잃더라도 남의 지배는 받을 수 없소. 이제 내 계획은 결정되었소.

 

공명이 답했다. 

"조조으 군단은 먼 북쪽에서 왔기에 심히 피로한 상태입니다. 병법에서도 백리 이상을 달리면 반드시 상장군을 잃는다 고 하지요. 더구나 북쪽 사람들은 수전에 능하지 못합니다. 이제 장군께서 유예주와 힘을 합치시면 조조의 군단을 쳐부수는 일은 필정의 일입니다. 그러면 형과 오의 세력은 강해져 조조와 정족의 형세가 성립될 것입니다."

손권을 회의를 마친 후 칼을 뽑아들더니 탁상을 두 조각으로 만들어 버렸다.

"앞으로 두 번 다시 조조에게 항복하자는 자가 있으면 이 꼴이 될 것이오"

주유의 죽음

유비 손권의 연합군은 양자강을 거슬러 올라가 적벽에서 조조의 군사와 대치했다. 조조는 80만 대군을 이끌고 진격해 오고 있었다. 조조는 양자강 북쪽에 진을 치고 주유는 그 건녀편에 진을 쳤다. 주유의 부장인 황개가 계책을 말했다.

 

"적은 숫자가 많아 지구전은 불리합니다. 그런데 조조의 군선을 보면 뱃전들이 가지런하지 않고 서로 엇갈려 있습니다. 그것을 볼진대 반드시 화공을 쓰면 무찌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황개는 조조에게 항복하겠다는 거짓 편지를 보냈다. 조조가 이를 믿고 황개를 기다렸다. 황개는 군선 안에 장작을 싣고 기름을 부어 놓았다. 마침 동풍이 불자 조조의 진영에 다가가 화공을 감행했다. 조조으 수군은 전소했고 대혼란에 빠졌다. 그때 주유 유비의 군사들이 쳐들어왔다. 조조는 강릉으로 도망쳤다.

 

조조는 조인, 서황을 강릉에 머물게 하고 악진을 양양에 주둔시킨 다음 북쪽으로 후퇴했다. 이렇게 해서 적벽대전은 끝이 났으며 조조의 남하정책의 꿈은 사라졌다. 조조는 북부 중국에 영토를 확보하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그와 동시에 유비는 형주 남부에서 세력을 펴며 천하삼분지계의 첫 발을 내딛었다.

 

공명이 동맹을 도모하기 위해 오에 갔을 때, 인격과 식견을 남들로부터 인정받았다. 장소가 제갈공명을 손권에게 추천했던 일도 있었다. 그때 제갈공명이 거절했다. 손권은 공명의 형인 제갈근에게 물었다.

"왜 동생 공명을 오땅에 붙들어 주지 않는 게요"

 

제갈근은 이렇게 대답했다.
"동생은 그 몸을 남에게 맡기고 군신의 의를 맺은 이상, 두 마음을 품지 안을 것임을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공명이 오 땅에 머무르지 않는 것은 제가 유비에게 가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공명은 적벽대전에 나서서 활약하지 않았다. 공명은 유비를 섬긴 지 1년 만에 군사. 재정을 담당하는 요직에 올랐다. 유비는 손부인을 아내로 맞은 후 손권을 방문하고 우의를 다졌다. 이때 공명이 반대했다.

 

"오의 내정으로 볼 때 그들은 우리를 호의적으로 생각하지 않을 것이나 가지 마십시오"

유비는 후일 이때의 일을 돌이켜 생각하며 중얼거렸다.

 

"천하의 지혜 있는 자들이 보는 것이 모두 같다. 공명이 나의 경구행에 대해 간했던 것도 이 일을 걱정해서였으리라. 실로 위험한 일이었어. 주유의 손에 잡히고 말 뻔했으니까.


손권을 주유의 의견을 받아들여 파촉의 공략을 결의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병으로 죽고 말았다. 그때 주유는 36살이었다. 주유는 유언으로 노숙을 자기 후임으로 천거했다. 서로 반목하던 두 사람이었지만 주유는 사심을 버리고 노숙을 후임자로 정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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