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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 인물기행/제갈공명7

차이나리 2018. 3. 25. 20:56

관우에 이어 장비를 잃은 유비의 운명

 

삼국지 인물기행/제갈공명8

 

서기 216년 조조는 위왕이 되었다. 후계자를 조비로 정했다. 이듬해 조비, 조식 형제가 태자의 자리를 놓고 다투다가 암투를 벌였다. 조식이 실각했다. 이 분위기를 틈타 유비가 출병을 준비했다. 법정이 건의를 했다.

"조조는 군사를 일으켜 장노를 항복시켰고 한중 땅을 평정했습니다. 그 승세를 타고 파촉을 취하지 않고 업 땅으로 돌아갔습니다. 내부에 심상치 않은 정세가 있을 것입니다. 백성을 모아서 하후연, 장합 등을 치면 승리를 거둘 수 있을 것입니다."

 

유비는 법정의 의견을 받아들여 한중 땅으로 출병할 것을 명햇다. 자신도 양평관으로 출진했다. 그는 성도를 지키고 있던 제갈공명에게 군사 지원을 요청했다. 공명은 즉시 증원부대를 파견했고, 유비는 정군산으로 군사를 몰아 하후연을 죽였다. 조조는 조운의 활약으로 물러섰다. 한중 땅이 유비에게 들어오자 유비는 한수 상류를 따라 형주 땅에 침입시켰다.

 

이 일을 계기로 유비는 제갈공명 이하 120명의 추대를 받고 한중왕이 되었다. 유비가 한중 땅이 된 직후 관우가 전사했다. 하는 수 없이 한중 땅을 포기했다.

 

손권의 부장이 노숙이 세상을 떠났다. 제갈공명도 노숙의 장례에 애도를 표했다. 노숙 대신 육구에 주둔한 사람이 여몽이었다. 관우는 노숙이 죽자 여몽과 대치했다. 손권이 관우의 딸을 며느리로 삼고 심다는 전갈을 보냈다. 관우는 이 제의를 한마디로 거절하였다. 그는 손권을 싫어했다. 유비가 한중왕이 되자 관우는 번성에 진을 치고 조인의 공격에 나섰다.

 

관우는 자기가 성을 비운 사이에 여몽이 배후에서 들어오는 것을 두려워한 나머지 강릉과 공안에 각각 미방, 부사인 등을 배치해 두었다. 이것이 불행의 씨앗이었다. 관우는 고지식했다. 관우는 미방, 부사인 등으로부터 반발심을 사고 있었다. 그들은 관우에게 물자도 보내주지 않았다. 관우는 화가 치밀었다.

"내가 돌아가면 엄벌에 처하리라"

 

관우는 북상해 조조의 구원군으로 파견된 우금을 사로잡았다. 번성 함락은 이제 눈앞에 있었다. 양양 이북의 여러 고을은 모두 관우엑 투항했다. 현재의 하남성 남쪽은 모두 관우의 지배하에 들어왔다. 조조의 참모들이 관우를 괴롭히자 하는 수 없이 퇴각했다. 조조는 서황에게 구원을 요청했으며 번성을 함락을 모면할 수 있었다. 사마중달은 손권과 관우 사이가 나쁘다는 점에 착안하여 손권에게 강남 땅을 주겠다는 구실로 동맹을 제의했다.

 

관우의 죽음

손권의 조카사위인 육손이 관우 앞으로 편지를 보냈다. 이 무명의 육손에게 관우는 손도 한번 제대로 못써보고 당했다. 관우는 군량이 부족하자 손권에게 의논도 없이 창고를 털었다. 손권은 이에 자극받아 관우를 공격했다. 손권은 조조에게 밀서를 보내 동맹을 청했다. 조조는 이 신청을 받아들였다. 여몽이 급습하여 관우의 수비병들을 모조리 잡았다. 미방, 부사인 등을 포섭했다. 북방에 진출 중인 관우는 강릉이 여몽 손아귀에 넘아간 것을 모르고 있었다.

 

관우가 번성에서 버티자 조조는 군사를 진군시켜 서황의 군단을 증강시켰다. 관우는 위기에 몰려 강릉 함락의 급보를 받았다. 유비는 관우가 번성에서 싸운다는 소식을 듣고 맹달에게 구원을 명했다. 그들은 관우를 도울 생각이 없었다. 관우는 아들 관평과 함께 장향에서 붙잡혔다. 손권은 두 사람을 참했고 마침내 형주의 지배권을 획득했다. 유비의 타격도 심했다. 이제 제갈공명의 구상이 실현될 가능성이 희박했다.

 

서기 220년 조조가 66세고 세상을 떠나자 조비가 뒤를 이어 위왕이 되었다. 곧 후한 헌제로부터 위를 물려받아 황위에 올랐다. 이 조비가 위문제이다. 유비와 제갈공명의 가슴에서는한실 부흥의 결의가 더 굳어졌다. 221년 유비는 군신들의 추대를 받아 성도에서 즉위했다. 제갈공명이 승상에 올랐으며 백관이 설정되었다. 이것이 촉한 왕조다. 이어 유선이 태자로 책봉되었다. 유비는 관우의 원수를 갚고자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형주를 되찾아야 했다. 이때 조운이 나섰다.

 

"폐하, 원수는 조조이지 손권이 아닙니다. 그리고 위를 먼저 멸망시키면 오는 스스로 항복해 올 것입니다. 조조는 이제 죽고 없지만 조비가 황제의 위를 도둑질하였다 합니다. 하루 속히 관중을 공략하시고 황하 위수의 흐름을 타고 내려가서  역적 조비를 토벌하소서. 위를 버려두고 손권의 오와 싸우시면 안됩니다.

 

유비가 출정하기 직전 장비측으로부터 상주문이 올라왔다. 장비가 죽었다. 그 순간 유비는 부하들을 때리는 장비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토록 주의를 주었건만...결국에는 부하들 손에 죽었겠지"

 

장비는 부하인 장달, 범강의 손에 암살당했던 것이다. 관우에 이어 장비를 잃은 유비는 그 슬픔을 안은 채 성도를 출발했다. 손권은 질겁을 하여 유비와 화친하기를 청했다. 유비는 거절했다. 이 일로 인해 제갈근은 동생인 공명과 내통을 하는 것이 아닌지 의심받을 수도 있었다. 그러자 손권은

"과인과 제갈근은 죽음을 앞에 두고도 변치 않기로 맹세를 한 사이야"라며 문제시하지 않았다.

 

유비는 군단을 둘로 나누어 자신은 양자강 남쪽 연안으로 진군했고, 부쪽 연안은 황권에게 지휘를 맡겼다. 그러나 유비는 대패했고, 황권은 후토하다가 위나라에 패했다. 유비는 가까스로 백제성까지 도망가 그곳 이름을 영안으로고쳤다. 손권은 유비에게 화친을 청했으며 오촉 연합이 성립되었다. 그러나 손권은 아직도 위나라와 손을 잡고 있었다.

유비의 죽음

유비는 관우의 원수를 갚으려다 실패했고 병상에 눕는 신세가 되었다. 죽음을 앞두고 제갈공명에게 태자 유선을 보좌시키고, 이엄으로 하여금 제갈공명을 돕게 하려는 생각이었다.

 

"그대의 재능은 조비의 10배는 되오, 만약 태자의 사람 됨됨이가 보좌할 가치가 있거든 보좌해 주오. 태자에게 그런 재능이 없다면 그대 스스로가 촉한의 천자가 되어 주기 바라오."

제갈공명은 눈물을 흘리며 대답했다.

"폐하, 신은 오르지 고굉의 힘을 다하여 충정의 마음으로 태자 저하를 받들어 모시겠나이다."

 

유비는 아들을 불러놓고 말했다.

"승상은 너의 재지가 남다르다고 말하더라. 그러하다면 이 아비는 무엇을 걱정하겠느냐. 한서와 예기를 읽도록 하여라 그리고 제자의 서, 육도, 상군서를 읽어라. 승상이 너희를 위하며 신자, 한비자,관자, 그리고 육도 등을 한 부씩 사본했는데 보내는 도중 분실되었다고 하더구나. 너희가 자진하여 나가서 가르침을 듣도록 하여라"
유비는 서기 223년 4월 24일 63세로 세상을 떠났다. 유비에게는 소열제 시호가 바쳐졌다. 혜릉에서 장사지냈는데 이 능은 오늘날 성도성 남쪽에 있다.

 

제갈공명은 팔진도를 비롯 삼면원진, 연형진을 완성했고, 십연발의 연노, 적의 진격을 막는 철질려, 노도 뚫지 못하는 통유개와 편수개철모 등을 고안했다고 한다. 그리고 군대 운용에 대해서도 기록했다.

 

"전쟁터에 있어서는 병사들을 떠들게 해서는 안된다. 북소리를 알아듣고 번과 휘를 잘 볼 수 있게 하여야 한다. 호령을 듣지 않고 전후좌우로 움직이는 자는 참한다. 육전에서 적의 기병이 쳐들어올 때 보병은 수레을 진 앞에 늘어놓고 방어하여야 한다.좁은 곳에서는 거치르 준비하도록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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